야설

여승무원, 연인, 여자 - 43부

야오리 1,264 2018.05.31 13:25
도대체 뭐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거야...
틀림없이 뭔가 있어...
틀림없이 뭔가 있다구...
혜미가...
나한테 갑자기...느닷없이...저러는 건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야.
혜미는...
내가 알고 있는 혜미는 저런 아이가 아니야.
나는 알고있다.
혜미가 나에게 싸늘해진 것이 결코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차분히…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잘 생각해 보자, 냉정하게.
침착함과 냉정함은 나의 특기잖아.
잘 생각해 보자…잘 정리해 보자…
문득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혜미 아버지의 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어떤 일이 이유라면 결코 나에게 저런 식으로 대하면서
매듭지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운 일까지 들추어내면서 나를 억지로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애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그렇다면 하나 밖에 없다.
혜미는 며칠 전 우리집을 다녀갔었다.
우리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난 그 날 이후부터…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문자를 피하고…내 전화를 애써 피하는 듯 했었다.
그리고 마지못한 척 나와서는…
갑자기 저런 태도를 나에게 보이면서 돌변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우리 집과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알아내야 한다.
알아내야만 한다.
혜미야…
혜미야…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니…
섹스 때문에 너를 만난다고?
그 따위 어리석고 하찮은 핑계따위는 필요 없어.
엔조이?
우리 둘이 실컷 즐겼으니까 된거 아니냐고?
웃음밖에 안나온다 정말.
오빠를 과소평가 하지 마…
너 오빠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널 억지로 잡아두겠다는게 아냐…
내가 널 점령하겠다는게 아냐…
내가 널 내 인형으로 만들겠다는게 아냐…
널 좋아하기 때문이야.
너도 알잖아, 오빠에게 네가 이미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너도 오빠 마음 잘 알잖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오빠를…구했었어…
몇 년 동안이나…
나 자신의 과오로 인해…
나 자신의 비겁함으로 인해…
죄의 수렁으로 빠졌던 나를…
스스로를 옭아매며 방황하던 나를…
어쩔 줄 몰라하며 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던 나를…
늪 구렁텅이로 스스로 빠져들며 허우적거리던 나를…
그런 나에게 넌 사랑으로 다가왔어.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그런 포근함으로…
오빠를 감싸줬잖아…
오빠를 구해 줬잖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같이 헤쳐나가자고 했잖아…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했잖아…
기내에서 졸던 그녀....
주차장에서 내게 안겨오던 그녀....
공항에서 쥐어주던 땅콩 두 봉지....
장난스럽지만 밝은 모습으로 햇살 아래 마주서서 내게 미소짓고 있던 그녀....
내 옆 좌석에서 푹 파묻히듯이 앉아있던 그녀....
노숙자에게 친절을 베풀던 그녀....
회한에 가득찬 나를 위로해주던 그녀....
성욱에게서 벗어난 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던 그녀....
죄많은 자신의 아빠가 가엾다며...용서해달라던 그녀....
혜미의 모습이....
그런 모습들이...내 머리 속에 가득 쌓이고 있다.
오빠는…
오빠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널 사랑해.
정말정말 사랑해.
혜미야…사랑해.
집에 먼저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니 아버지께서도 퇴근하고 집에 계시다고 한다.
나는 집으로 곧장 차를 몰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집으로 들어섰다.
나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거실로 향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
“왔느냐?”
“네…아버지, 담배 태우시면 안된다는 것 아시잖아요?”
“그래…”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담배를 끊으시지 않는다.
묵묵히 다시 한모금을 빠시더니…
나지막히 중얼거리듯 말씀하신다.
“그래도…한대 태우고 싶구나…”
“……………일 때문에 많이 힘드신가요?”
“……….그래…”
아버지께서 잠시 침묵을 지키시다가 나지막하게 대답하시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문득, 그렇지만 강렬하게 뇌리를 스친다.
나는 주저없이 아버지에게 여쭈어보았다.
“아버지, 혹시 혜미를 만나셨나요?”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신다.
아무 표정이 없으시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그랬구나…그랬던 거였구나…!!
“만나셨군요?”
“…………………..”
이 순간을 놓치지 말자.
그냥 밀고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아버지, 저 오늘 혜미를 만났습니다. 혜미가 요즘 전화를 잘 받지 않았습니다.
저를 애써 피하려는 듯 하더군요. 그러다가 오늘 간신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혜미가 저더러 그만 만나자고 하더군요.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저에게 단호하게 그러더군요.
어이가 없었지만, 당연하게도 순순히 그러자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혜미는 결코 저에게 갑작스럽게 그럴 아이가 아니거든요.
틀림없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이 혜미를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동안 아버지께서도 웬지 저를 서먹서먹하게 대하시는 듯 하더군요.
공교롭게도 혜미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요.
이게 결코 우연은 아닐거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 말씀해 주십시오.
혜미를 만나셔서 어떤 말씀을 하신겁니까?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혜미가 갑자기 저에게 그러는지 알고 싶습니다.
혹시 혜미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 겁니까?
어머니가 없이, 그렇게 자란 아이라서 싫으신 겁니까?
그런건 모두 좋습니다.
만일 정말로 혜미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마음에 안 드시는 이유가 충분히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 못해 주실 것은 없지 않으신가요?
아버지,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거침없이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다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윽한 눈길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아버지께서…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
하지만 결코 화가 나시거나 괘씸하다는 눈빛은 아니었다.
아버지는…내가 존경하는 아버지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시다.
생각이 깨어있는 분이셨다.
대화채널이 항상 열려계신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이유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입가를 응시하면서 말씀이 떨어지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아무 말씀도 없이 그렇게 잠시 나를 바라보고만 계셨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뭔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엄숙한 분위기에 잠시 짓눌려 나도 모르게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래…앉거라. 앉아서 이야기 하자꾸나.
네 말이 맞다.
감추어서는 안될 일인 것 같구나.
어떤 경우에는…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일도 분명히 있는 법이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잠시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아버지의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께서 다시 담배를 한 개피 꺼내서는 불을 붙이신다.
그리고 후욱~! 하며 한모금 연기를 뿜어내었다.
“세상 일이란건 정말 끊임없이 사람을 놀래키는구나!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렇게 놀라면서…당황하면서 살아야 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문제가 또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면서
사람을 놀래키곤 하는구나…!”
무슨 말씀이실까…아직까진 짐작이 전혀 되질 않는다.
아버지의 이어지는 말씀이 귀를 파고들고 있었다.
“혜미라는 아이를 네가 처음 집으로 데려왔던 그 날…
그 순간 매우 놀라고 말았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와닿았어.”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그 날 혜미가 인사를 드렸을 때 흠칫 놀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런데…그게 도대체 어쨋다는 걸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마. 혜미는 내 조카다.”
“네??!!”
아버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혜미의 어머니…너도 알고 있겠지?
혜미의 어머니 이름을…임 옥임…
옥임이는 내 배다른 누이동생이다.
혜미가 옥임이의 딸이니 당연히 내 조카이지.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고…
이제 왜 내가 당황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느냐?”
혼란…!!!
아아…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어지럽다…
이…이런…
이…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잠시…잠시…머리 속을 좀 정리해 보자…
“옥임이는…불행했지…
네 조부께서…잘못하셨던거야…
네 조부의 욕심으로…세상에 그렇게 내던져진 아이였다…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그렇게 쓸쓸하게 살다가…힘들게…외롭게 살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건…그 아이의 본모습이 결코 아니었어.
옥임이는 아름답기도 했지만…
숱한 곤경 속에서도 항상 밝고 활발했다.
착한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아이였지…
그 모든 것을 자기 품에 묵묵히 보듬어 두려고 했던 아이였다…
내 형제들은 오히려 그들 모녀의 존재를 감추고 부정하기에 바빴지…
홀대했었다…
세상의 가장 비참한 지경으로 그들 모녀를 내몰고 말았다…
난 그 아이와 비교적 가깝게 지내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난 그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주질 못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아이를 잊고 살았다…
어쩌면 나 자신도…우리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아…사람이란 이렇게 죄가 많은 존재인가 보구나…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그렇게 무심했던 죄의 벌이…
이런 식으로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고 마는가 보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말씀을 내뱉은 이상…거두어 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숨기고 싶었던 일을 드러내면 낼수록…
그 속에 점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이…
그렇게 목소리에 실려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옥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난 그 곳에 가서 옥임을 위로했었다.
옥임은 그 때 결혼한지 얼마 되지않은 새 신부였다.
옥임의 신랑은…아주 순수하고 맑은 젊은이었지.
안 태훈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짐작컨대...
아니, 확신하건대…혜미의 친아버지는 그 안태훈이라는 사람이다.
지금 혜미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야…
그 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결코 모른척하고 내팽겨칠 수는 없겠지.
내가 나름대로 알아보도록 하마.
그리고…혜미가 나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이상…그 아이를 홀로 내버려두지는 않겠다.
내가 나름대로…그 아이를 나름대로 뒤에서 숨어서나마 지켜보면서 돌보도록 하마.
나로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재성아…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너희들은 사촌이다…
모르고 이 지경까지 왔으니 왜 그랬냐고 너희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에서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 외에는 따로 방법이 없는 것 같구나.”
나는 잠자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혜미는…
지금 이 순간 혜미는…
혜미야…
“혜미에게도 이런 말씀을 다 하셨습니까?”
“그래…들려줬다.”
“혜미는…어떤 반응이었습니까…?”
“한없이 울더구나…”
아버지께서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한없이…
한없이…울었다고 한다…혜미가…
혜미가 한없이…울었다고….
그래, 그랬을 것이다....
혜미는 그랬을 것이다...
혜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혜미의 쓸쓸해 하던 눈빛이…
갖은 불행 속에서 눈물 짓던 모습이…
내가 떠올리기만 하면…
머릿 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여지는…
혜미의 가장 슬픈 표정들이…
이 순간 내 머리 속에 가득했다…
하지만…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 혜미가 겪어왔던 그 어떤 아픔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큰 불행의 순간이…
혜미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간신히…
간신히…
어느 정도나마…
되찾게 된 혜미의 웃음이…
기쁨이…
행복이…
희망이…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다.
이제 혜미는…
어쩌면 혜미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시 주저앉아버릴지도...모른다...
..............................
..............................!!!
"안돼!!!"
안돼!!!
안돼!!!
그래선 안돼!!!
절대로 안돼!!!
이대로…
그냥 이대로…
혜미를 내팽겨쳐 버릴 수는 없다.
혜미의 할머니가…
혜미의 어머니가…
그리고 이제 혜미마저도…
안돼, 그럴 수는 없어.
혜미를 그렇게 내버릴 수는 없다.
희망의 끈을 스스로 놓아선 안돼.
혜미야…아직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네가 아직 모르는 일이 남아있어.
희망의 끈을 붙들기 위해선...
잡기 위해선...
불효자식이 되어야 한다.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나즈막한 부름에...
아버지께서 내 눈을 응시하신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저와 혜미는 사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안색이 한순간에 확 변하신다.
“너...너 지금....무슨 소릴 하는거냐…!!”
순간적인 흥분으로...음성이 부들부들 떨려 나오신다.
아버지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저와 혜미는 사촌이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넌 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음성이...격노하고 계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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