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서른의 난 스물다섯 그를 오빠 ... - 7부

야오리 1,650 2018.04.08 23:50
2004년 11월 26일... 아침부터 잔뜩 흐려있었던 하늘은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는 아이의 눈망울 같아보였는데... 누군가 아이를 울리고 말았나 보다. 아이의 눈물은 짓눈깨비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 창밖을 봐. 첫눈이 내려. 우리 약속 기억하지?
메시지를 바라보며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항상 막연한 느낌으로 온라인 속에서만 대했던 그도 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바닥 위의 새하얀 눈이 다시 바람에 날려 그의 어깨에도 내려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 보고 있어요. 그런데 약속이 뭐죠??
‘약속’이라는 현실의 단어는 그와의 대화에서 한 번도 사용되어진 적이 없었다. 아니 사용되어 질 수 없는 단어였다! 지난 다섯달 동안 비밀스럽게 행해진 우리의 의식은 현실의 틀을 깨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누구도 그 틀을 깨는 위험을 원치 않았었다.
- 첫눈이 오면 같이 앉아 코코아 마시기로 했잖아?
잊고 있었던 약속을 그가 기억하고 있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기억속의 약속. 그 무렵의 나는 그에게 누나라고 불리고 있었고 그는 마음 잘 맞는 동생일 뿐이었기에 그런 약속을 했으리라.
- 하지만 우린 그때 그 약속을 하던 사이가 아니에요.
그는 스물아홉의 누나에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는 아가로 답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대화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행선의 끝에서 난 그의 설득을 받아 들였다.
- 정말 약속 꼭 지켜요. 아니면 다시 안 볼 거에요.
그에게 몇 가지 다짐을 받고 오늘 하루 차를 함께 마시는 그 동안만 그의 자상했던 누나가 되어 여름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내리는 눈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한 네온으로 장식된 아담한 카페의 창가에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더 어려보이는 그가 홀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며 그에게 다가 갈수록 애써 담담하게 생각하려는 마음과는 달리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만 했다.
“어. 누나 왔어. 밖에 많이 추웠지? 괜히 나오라고 그랬나봐.”
말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말을 이끌어 나갔고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그는 오래 전부터 알던 누나에게 말하듯 일상의 언어로 대해주었고,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나를 애써 외면해 주었다.
이윽고 찻잔의 온기가 사라질 때쯤 우리가 약속했던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난 아무런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지만 서둘러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누나. 누나로서 나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그가 날 불러 세웠다. 갑자기 도망치듯 달아나려는 내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오늘 하루 그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따뜻한 누나의 품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동안 스쳐갔다.
내 품에 그를, 아니 동생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팔이 그의 허리에 둘러지고 그가 내 어깨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을 때 너무도 편안했던 그의 품속에서 안겨 있는 건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건 누나가 동생한테 해주는 거야. 오늘 미안해서...”
그의 품을 빠져나오며 나도 모르게 그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왜 그의 품이 그렇게 편안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도 모르게 저질러버린 도발이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서둘러 갈 길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 와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는 날 완벽하게 누나로 대해 주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의 품에서 그를 남자로 느끼고 말았다. 이런 내 감정을 그가 알아챈 건 아니까 불안해지는 마음은 그의 연락이 없기에 더해만 갔다.
- 난 오늘 좋았는데.. 어땠어.. 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달래가며 애써 태연한 척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는 기다리다 지쳐가던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곧 남편이 들어올 테고 그전에 그의 반응과 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 나도. 좋았고.. 고마웠고.. 그래.
- 그런데 연락도 안하고.. 걱정했잖아.. 요.
- 사실 싫다고 할까봐 먼저 연락 못했어.
그랬다. 순수한 의도의 만남이었지만 우리의 비밀은 그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부담스러운 걸림돌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오늘 우리의 비밀을 묻어둔 채 일상의 모습으로도 서로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내게는 편안한 가슴을 가진 그가 느껴진 날이었고 모든 약속을 지켜준 그가 더 미덥게 다가온 날이었다. 창밖엔 아직 우리의 첫눈이 내리고 있고 내 작은 수첩엔 오늘을 기억하기위한 빨간 하트가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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