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선배녀 13부

야오리 3,826 2019.04.15 23:58
약속 있다던 지연이 누나를 잠깐 얼굴만 보자고 불러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약속이라고 해봤자 혜림이 누나랑 지연이 누나 집에서 노는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아직까지는 내 속셈을 드러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연이 누나를 대하면서 지연이 누나의 동태를 살폈다.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자꾸 시계를 쳐다보는 지연이 누나였다.
 
“몇 시까지 가야 돼?”
 
“다섯 시.”
 
“누구 만나? 혜림이 누나?”
 
“어? 어.”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안 돼.”
 
“왜? 같이 놀면 좋잖아.”
 
지연이 누나의 눈빛이 흔들렸고 목소리 또한 미세하게 떨렸다.
 
“진원이…… 진원이도 만날 거야. 원래 진원이 만나는데 혜림이도 잠깐 보는 거야.”
 
혜림이 누나에게 듣기로는 지연이 누나와 혜림이 누나 단둘이서만 논다고 했다. 그런데 지연이 누나는 진원이 형까지 팔아먹으면서 나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접어두고 다시 지연이 누나에게 미끼를 던졌다.
 
“그래? 아쉽네. 오늘따라 왠지 너랑 밤새 놀고 싶었는데…….”
 
“다음에…… 다음에 놀자.”
 
“어디로 가야 돼?”
 
“여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럼 천천히 가도 되겠네.”
 
“한 15분 후에 일어나면 돼.”
 
지연이 누나는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15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연이 누나의 불량한 태도를 눈감아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지연이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왜?”
 
“너 갈 때 됐잖아. 데려다줄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1분, 1초가 흐르는 것까지 다 세고 있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연기를 펼쳐 보이는 지연이 누나였다. 그런 지연이 누나의 거짓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소로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연이 누나와 나 사이에 지연이 누나가 만들어 놓은 얇은 유리벽을 산산이 깨트릴 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커피전문점에서 나왔고, 나는 지연이 누나에게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 데려다줄게.”
 
지연이 누나는 입을 열려다가 멈칫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냐. 혼자 갈게. 진원이 마주칠 수도 있잖아. 넌 그냥 여기서 가.”
 
“그래? 알았어.”
 
나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갔고, 내가 계단을 밟는 걸 보자마자 지연이 누나는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혜림이 누나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혜림이 누나가 지연이 누나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 다음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그 마트로 갈 작정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다시 올라온 나는 택시를 타고 근처 대형마트로 이동했다. 혜림이 누나에게 마트에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고 조치를 취해놓고 마트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전자제품 코너로 간 나는 소파에 앉아 3D TV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3D TV보다 일반 LED TV에 더 눈길이 갔다. 내 방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브라운관 TV는 폐기처분하고 벽에다가 LED TV 한 대 걸어놓으면 비디오게임을 더 실감나고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방에 어울릴만한 TV를 둘러보고 있는데 혜림이 누나에게서 마트 안으로 들어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전자제품 코너에서 나와 그녀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휙휙 돌리며 마트 구석구석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마침내 내 눈에 포착된 그녀들은 해산물 코너에 서서 새우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녀들 뒤에 선 나는 지연이 누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진원이 형 여자친구 아니세요?”
 
지연이 누나는 날 보더니 화들짝 놀랐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진원이 형이랑은 같이 안 왔나 봐요?”
 
지연이 누나는 상황파악이 됐는지 혜림이 누나를 쏘아보았다. 혜림이 누나는 내 뒤로 숨으면서 말했다.
 
“내가 일부러 말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실수로……. 미안해, 지연아.”
 
“그럼 그랬다고 나한테 말해줬어야지.”
 
나는 나의 정보원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연아, 넌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응? 뭘?”
 
“혜림이 누나랑 밤새 논다는 거?”
 
“그야…….”
 
할 말이 없는지 말을 잇지 못하던 지연이 누나가 도리어 내게 큰소리쳤다.
 
“너도 나 놔두고 엠티 갔잖아.”
 
“난 말 하고 갔어.”
 
“이건 꼭 말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
 
“그럼 거짓말은 왜 했어?”
 
“무슨 거짓말?”
 
“진원이 형이랑 만난다며?”
 
“네가 따라오려고 그러니까 그랬지.”
 
“좀 따라와서 같이 놀면 안 되냐?”
 
지연이 누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너만 생각하지. 혜림이가 불편하거나 마음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나랑 둘이 놀겠다고 왔는데 너 있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어떨 것 같아? 넌 그런 생각들은 안 하지?”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 지연이 누나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사과받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천하의 나쁜 놈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고 이런 식으로 더 대화를 나누다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어 몸으로 표출될 것 같은 상태에 이르렀을 때 혜림이 누나가 중재에 나섰다.
 
“왜들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셋이서 재밌게 놀자. 난 윤호 안 불편해. 윤호야, 너도 나 안 불편하지? 응?”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네.”
 
“지연아, 봤지? 우리 서로 안 불편하고 친하니까 너도 우리 신경 쓸 거 없이 맘 편하게 놀아도 돼. 마음 풀고 그냥 놀자. 응? 응?”
 
“됐어. 쟤 가라 그래.”
 
“왜 그래?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놀아. 내가 윤호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래. 날 봐서 같이 놀자.”
 
지연이 누나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혜림이 누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혜림이 누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이번에는 혜림이 누나가 지연이 누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뭐야? 사람 앞에 두고 둘이서…….”
 
“신경 꺼.”
 
“아냐, 아무것도…….”
 
지연이 누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못마땅한지 톡톡거렸고, 혜림이 누나는 행여나 또 나랑 지연이 누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됐는지 얼른 막아섰다. 혜림이 누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짜증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
 
“뭔데 숨겨? 당당하게 말해.”
 
혜림이 누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이해해달라는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윤호야, 잠깐만 여기 있을래? 우리 얘기 좀 하고 올게.”
 
지연이 누나와 혜림이 누나는 내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밀담을 나누었다. 내용이 무엇이건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고, 지연이 누나에 대해 생겼던 불신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괜히 지연이 누나 놀라게 해주려고 했다가 내 마음만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 꼴이었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지연이 누나가 앞장서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정윤호, 너 혜림이랑 둘이 장보고 와. 난 먼저 집에 가있을 테니까.”
 
“왜?”
 
지연이 누나는 대답도 않은 채 돌아서 걸어갔고, 나는 붙잡으려고 따라가려다가 오히려 내가 붙잡히고 말았다. 혜림이 누나는 날 붙잡고 지연이 누나를 보내주라는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지연이 집 지금 청소 하나도 안 해서 엄청 더럽대. 그래서 치워야 된다니까 그냥 먼저 가라고 해.”
 
“고작 그것 때문이야?”
 
“고작이라니. 여자들은 그런 거에 민감해.”
 
“그렇다고 저렇게 휑하니 돌아서 가냐?”
 
“마음 넓은 네가 이해해줘. 우리도 빨리 장보고 가야지?”
 
마음이 석연치 않았지만 물증도 없고, 이거다 하는 심증도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뭐 사야 되는데?”
 
“새우랑 스파게티 면이랑 와인만 사면된다고 했어.”
 
혜림이 누나는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새우랑 스파게티 면, 그리고 와인 두 병을 골라 카트에 담았다.
 
“두 병이 다야?”
 
“집에 양주랑 맥주 있다고 했어.”
 
“그래? 그럼 이제 갈까?”
 
혜림이 누나는 핸드폰을 보더니 머뭇거렸다.
 
“왜?”
 
“좀 이른 거 같아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데?”
 
“십분 정도? 근데…… 유리도 온대.”
 
“유리 누나는 갑자기 왜?”
 
“원래 오는 거였는데 내가 잘못알고 있었나봐.”
 
“유리 누나는 내가 지연이랑 사귀는 거 모르잖아?”
 
“이렇게 된 거 지연이가 말하겠대.”
 
“…… 그래?”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발생해버렸다. 유리 누나라면 내가 혜림이 누나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데, 지연이 누나와 내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렵기도 하면서 흥미롭기도 했다. 시원한 유리 누나의 성격상 굳이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을 것도 같았고, 화끈하게 다 까발려버리고 상황을 깨끗이 정리시켜 줄지도 몰랐다. 전자라면 현재 상황에서 달라질 게 하나 없겠지만 후자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었다.
 
또 하나, 혜림이 누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지난 번 일로 자신이 알던 혜림이 누나가 아닌 다른 모습의 혜림이 누나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던 것 같았는데, 내가 지연이 누나와 사귀고 있는 걸 알면서도 혜림이 누나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유리 누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빨리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연이 누나가 양다리였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냥 그러려니 할지 아니면 이마저도 놀라워 할지 유리 누나의 반응을 보면 지연이 누나의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호기심이 솟구치는 이유는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리 누나에 대한 믿음덕분이었다. 그렇더라도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크게 숨을 내쉬어 봐도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왜? 긴장 돼? 긴장 하지 마. 유리는 그렇게 신경 안 쓸 거야.”
 
“그렇겠지?”
 
혜림이 누나의 핸드폰이 울렸고, 혜림이 누나는 문자를 확인하며 말했다.
 
“어. 신경 안 써. 지연이가 이제 와도 된대. 가자.”
 
“어, 가자…… 가.”
 
쿵쾅거리는 내 가슴은 지연이 누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집에 들어갔을 때 지연이 누나는 날 본척만척하며 여전히 냉랭한 반응을 보였고, 혜림이 누나는 그런 우리 둘 사이를 보기 힘들었는지 지연이 누나를 붙잡고 말했다.
 
“너 윤호랑 화해 안 하면 나 집에 갈 거야.”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화해를 해?”
 
“화해를 하든지 용서를 하든지 어쨌든 둘이 저 방에 들어가. 그리고 너희 서로를 보면서 웃을 수 있을 때까지 나오지 마.”
 
“우리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빨리 요리나 하자.”
 
“나 간다?”
 
“알았어, 알았어. 화해하면 되잖아. 정윤호, 미안해.”
 
지연이 누나는 건성으로 사과를 했고, 나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혜림이 누나는 우리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나 갈래.”
 
“아니야, 혜림아. 제대로 할게.”
 
지연이 누나의 말에 혜림이 누나는 움직임을 멈추고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저 방에 들어가. 그리고 완전히 풀릴 때까지 나오지 마.”
 
“그냥 여기서 할게.”
 
“내가 꼭 봐야 돼? 둘이 해결해. 싫음 나 가고…….”
 
지연이 누나는 내 손목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서자 지연이 누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혹시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은지 조용히 말했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일단 휴전협정 맺자.”
 
“알았어.”
 
“그럼 웃어.”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자연스럽게 좀 웃어봐.”
 
이번에는 입꼬리를 살짝만 움직였다. 지연이 누나는 이번에도 내 표정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잘 할 수 없어?”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잘 해.”
 
지연이 누나가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은근하게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얼굴을 살며시 내 얼굴 가까이로 가져오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가슴은 두근거렸고, 순간 나는 긴장하여 숨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내 몸에서 지연이 누나를 밀쳐내며 말했다.
 
“왜 이래?”
 
“이렇게…… 이렇게 좀 해보란 말이야.”
 
날 갖고 싶다고 말하던 그 눈빛이, 내게 모든 걸 허락한다던 그 미소가 모두 연기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이 여우한테 당했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리며 짜증이 났다.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나는 지연이 누나의 손목을 잡아 당겨 안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그게 다정한 표정이야?”
 
“그럼 이건 어때?”
 
나는 거칠게 지연이 누나의 입술을 덮쳤다. 분풀이라도 하는 기세로 지연이 누나의 입술과 혀를 난폭하게 다루고 있는 내 혀였다. 지연이 누나의 혀도 지지 않고 내 입술과 혀를 살짝살짝 깨물며 앙칼진 키스로 대응했다. 나는 지연이 누나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고 지연이 누나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눈빛에는 무서울 정도로 매서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연이 누나가 먼저 내 입술을 덮쳤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은 뜨거운 키스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우리의 키스는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달콤해지고 있었다. 내 손은 지연이 누나의 가슴을 어루만졌고, 지연이 누나는 날 꼭 끌어안았다.
 
화해의 키스도 잠시 내 입술에서 지연이 누나의 입술이 떨어지더니 작고 귀여운 입술이 움직였다.
 
“혜림이 기다리겠다. 그만하고 나가자.”
 
난 아쉬움이 남았지만 지연이 누나의 뜻에 따랐다. 방에서 나가니 혜림이 누나는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연이 누나도 얼른 부엌으로 가 혜림이 누나와 함께 요리를 준비했다. 지연이 누나와 혜림이 누나는 새우크림스파게티를 만들겠다고 부엌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연이 누나와 화해하고 나자 다시금 유리 누나에 대한 걱정이 되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유리 누나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유리 누나가 오기를 손에 땀을 쥐며 기다렸다.
 
생각에 잠겨 있어 듣지 못했는데 초인종소리가 울렸었나보다. 지연이 누나가 내게 현관문을 열어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지연이 누나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현관문의 열림 버튼을 누르자마자 유리 누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야, 박지연! 너 갑자기…….”
 
유리 누나는 날 보고는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어서 와요. 저녁 다 되어 가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너 왜 여기 있냐고?”
 
유리 누나의 말을 들었는지 지연이 누나가 날 대신해 대답해주었다.
 
“내가 불렀어.”
 
“얘는 왜?”
 
“일단 앉아서 기다려.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줄게.”
 
나는 소파로 돌아가 앉았고, 뒤따라 유리 누나도 소파에 앉으며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혜림이 때문이야?”
 
“아니에요. 곧 알게 될 테니 숨 좀 돌리고 기다려요.”
 
유리 누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리 누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파게티가 완성이 되고 저녁식사를 위해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랑 지연이 누나가 나란히 앉았고, 혜림이 누나와 유리 누나가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유리 누나는 자리배치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는지 갸우뚱하며 지연이 누나와 날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각자의 앞에는 하얀 크림소스에 면과 새우가 잘 버무려져 있었고, 그 위에 파슬리가루가 뿌려져 먹음직스러웠다.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포크를 집으려 할 때 지연이 누나가 손뼉을 치며 신난 듯 말했다.
 
“와인이 빠지면 안 되겠지?”
 
지연이 누나가 옆에 있던 와인과 와인 오프너를 내게 건네주었다. 가족끼리 두어 번 와인을 마신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와인 개봉은 아버지의 몫이었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와인 개봉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와인을 열 때도 눈여겨보지 않아서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대충 기억을 더듬어 스크류를 와인 입구에 꽂으려했다. 지연이 누나는 내 손목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칼로 알루미늄 캡부터 잘라서 벗겨내.”
 
나는 전혀 숙달되지 않은 실력으로 알루미늄 캡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답답했던지 유리 누나가 나섰다.
 
“이리 줘. 내가 열게.”
 
무시당한 거 같아서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괜히 오기로 계속 하다가 더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순순히 내주었다. 유리 누나는 능수능란하게 와인 코르크를 빼내었고, 각자의 잔에 따라주었다.
 
지연이 누나가 잔을 들어 사랑과 우정을 위한 건배를 제의했고, 우리는 서로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난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사랑을 위한 건배를 해야 하는지 혼돈스러웠다. 지연이 누나일까, 소연이일까, 아니면 혜림이 누나일까, 누구 한 사람을 꼽을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얘기해. 윤호는 왜 이 자리에 있어야 돼?”
 
유리 누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버거웠는지 아까 듣지 못한 대답을 빨리 해주길 요구했다. 이에 지연이 누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유리야,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남자친구야.”
 
“뭐?”
 
유리 누나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는지 내게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으려했다.
 
“너…… 너…….”
 
하지만 뒷얘기는 더 이상 이을 수 없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리 누나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지연이 누나를 쳐다보았다.
 
“진원이는?”
 
“헤어질 거야.”
 
“좋아. 넌 됐고…….”
 
지연이 누나의 문제는 별다른 말없이 시원하게 넘어갔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서 헷갈렸다. 지연이 누나라면 다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경황이 없어서 빨리빨리 듣고 정리를 하고 싶어 일단 넘긴 것일까. 아무튼 다음 타깃은 혜림이 누나였다.
 
“그럼 넌 알고 있었어?”
 
혜림이 누나는 조금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알게 됐어.”
 
“그런데도…….”
 
유리 누나는 홱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뜨끔했고, 유리 누나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몰라 불안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날 노려보던 유리 누나는 짧은 정적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소연이랑 사귄다며?”
 
다행히도 혜림이 누나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안도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건 눈속임용이죠.”
 
“누구? 진원이 속이려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소연이는 네가 이용하고 있단 걸 알아?”
 
“모르죠.”
 
“너 정말 나쁜…….”
 
유리 누나는 내게 욕을 퍼부으려는 것 같았으나 지연이 누나를 흘깃 보더니 멈추고는 푹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됐다. 파스타나 먹자.”
 
그제야 지연이 누나와 혜림이 누나는 포크를 집어 들어 파스타를 맛보기 시작했다. 나는 한순간 긴장이 풀리며 바짝 말라있는 입안을 축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잔에 있던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지만 타오르던 갈증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와인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지연이 누나는 그런 내가 걱정이 되는지 내 허벅지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유리 누나는 지연이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내가 아니꼬운지 톡 쏘았다.
 
“속이 많이 타나본데 내비 둬. 안 그래, 윤호야?”
 
“네, 뭐…… 맛있네요. 이거…….”
 
난 유리 누나를 콕 쥐어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유리 누나에게 억지로 미소 지어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유리 누나는 날 흘기며 포크로 파스타를 말았다. 나도 포크로 그릇을 콕 찍어 파스타를 말아 입안으로 가져다 넣었다. 여태 내가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입에 넣자마자 지연이 누나는 내게 물어왔다.
 
“어때? 맛있어?”
 
“응. 되게 고소하고 부드럽다. 맛있어.”
 
“다행이다. 네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유리 누나가 툭하면 날 노려보는 바람에 파스타가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모른 채 한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비추
2341 승호 이야기 17 야오리 2019.04.16 2372 0 0
2340 승호 이야기 18 야오리 2019.04.16 2351 0 0
2339 승호 이야기 19 야오리 2019.04.16 2533 0 0
2338 선배녀 11부 야오리 2019.04.15 3582 0 0
2337 선배녀 12부 야오리 2019.04.15 2980 0 0
열람중 선배녀 13부 야오리 2019.04.15 3827 0 0
2335 승호 이야기 1 야오리 2019.04.15 10141 0 0
2334 나의 처제 이야기 20 야오리 2019.04.14 3979 0 0
2333 나의 처제 이야기 21 야오리 2019.04.14 3406 0 0
2332 나의 처제 이야기 22 야오리 2019.04.14 3486 0 0
2331 나의 처제 이야기 23 야오리 2019.04.14 3456 0 0
2330 나의 처제 이야기 24 야오리 2019.04.14 4340 0 0
2329 나의 처제 이야기 25 야오리 2019.04.14 3699 0 1
2328 나의 처제 이야기 26 야오리 2019.04.14 3301 0 0
2327 나의 처제 이야기 27 야오리 2019.04.14 335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