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近親] 여동생 - 3부

야오리 3,910 2018.03.22 21:28
이번글에서 부담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Theday"님의 말씀이 제 상태를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한번에 너무 큰 관심을 받다보니 마치 프로야구 선수들 2년차 징크스를 앓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박 작품을 펑펑 쏟아낸다 하더라도 결국 익명성에 묻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뭘그리 고민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머리와 마음이 따로 돌아 갔던 모양입니다.
나름대로 뭔가를 깨달고 보니 많이 홀가분해 졌습니다.
Killing Time용으로 읽으셔도 좋고, 뭔가를 느끼려고 하셔도 좋습니다.
전 다만 한자, 한자 성의를 다해 쓸 것이고 나머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열13님" 기약할 순 없지만 언젠간 술 한잔 얻어 먹으로 가겠습니다. 하하하 ^^*
참,, 저 우수작가가 되어있던데.... 축하 좀 해 주세요!!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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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방 안은 훈기로 가득했지만 가슴 속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큰 실수를 한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풀어야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머리 속이 엉킨 실타래 같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생각이 쉬 멈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길고 긴 고민 끝에 하나의 의구심이 솟았다.
나는 아직 그녀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진짜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성씨는 윤가였고 그녀의 성씨는 차가였다.
그리고 아무리 기억을 털어봐도 그녀 집안이 우리 외가랑 무슨 인척관계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저 혈연처럼 느껴지는 이웃일 것이다.
흔히 시골 마을의 이웃끼리는 다 그렇게들 지내지 않는가!
게다가 그녀의 집과 나의 외가댁은 담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니
오히려 그 정도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일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제서야 뚜렷한 형체 없이 마음을 짓눌렀던 짐 하나가 벗겨졌다.
그녀는 근친관계에 당황했던 것이 아니라
집 안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현재의 자기 모습이 나로 인해 알려질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이봐, 아들! 이제 일어나야지!”
“아~~ 조금만 더 잘게요.”
“다시 자더라도 저녁은 먹어야지. 아버지 기다리시니까 어서 일어나!”
12시간 정도 잤나 보다. 아침, 점심을 걸렀는데도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깨작거리고 먹었다간 불호령이 떨어지니 억지로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밥을 씹어 삼키는 동안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맑아져 갔다.
그러면서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꿈을 꾼 것처럼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외할아버지 옆집에 혹시 깐돌이라는 애 살지 않았어요?”
“갑자기 그 건 왜 묻는 거니?”
“그냥요. 옆집 사는 애 깐돌이 맞죠?”
“그래, 깐돌이 맞아.”
“진짜 이름이 깐돌이에요?”
“그건 아니고, 뭐더라 음,, 엄마도 기억이 잘 안 나네.”
“깐돌이네 하고 외가댁하고는 친척 아니죠?”
“아니긴, 깐돌이 아빠가 엄마 사촌동생인데.”
국을 푸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라고 확신하고 의미 없이 물었던 말인데 이게 왠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면 깐돌이 아버지가 나에겐 5촌 아재이고 깐돌이랑 깐돌이 동생은 6촌 동생들이지 않은가!
나는 아버지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안방으로 들어간 후에 궁금했던 나머지 질문들을 쏟아냈다.
“깐돌이 아버지 윤씨에요?”
“아니, 차씨지.”
“그럼 엄마랑 이종사촌간인 거에요?”
“응, 외할아버지 여동생이 깐돌이 할머니잖아. 몰랐어?”
“네, 그럼 깐돌이 할머니가 엄마한텐 이모겠네요.”
“그렇지!”
정말이지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연이 다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럼 깐돌이 아버지는 저한테 5촌 아재 맞죠?”
“그렇지, 깐돌이는 너랑 6촌이고.”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제 6촌 동생과 근친관계를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고무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간 것처럼 어깨가 축 쳐졌다.
“왜 그래?”
“아뇨, 속이 좀 쓰리네요. 어제 무리했나 봐요.”
“술 많이 마셨니?”
“네, 좀……”
“평소엔 잘 안마시더니.”
“윗사람들이 권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꿀물이라도 타줘?”
“아니에요. 엄마 저 밥 그만 먹을게요. 안 넘어 가네요.”
“그래, 그럼 한 숨 더 자든지 해라.”
“네, 근데 깐돌이네 못살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쪽 과수원이 전부 깐돌이네 건데.”
“아~, 그럼 깐돌이네랑 외가댁이랑 사이 안 좋아요?”
“외가댁 사람들 다 사이 좋게 지내. 근데 그건 또 왜?”
“아뇨, 엄마가 다른 5촌 이모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시는 거 아는데 깐돌이 아버지 얘기는 전혀 안 하셔서요. 게다가 저는 5촌 아재인 것도 몰랐잖아요.”
“어릴 때야 친하게 지냈지.”
이제 더 이상 확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나는 운명의 장난으로 상상도 해보지 않은 6촌 동생과 육체관계를 맺고 만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마음에 동요도 없었다.
만약 6촌 동생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럴 리 없었겠지만 그 동안 알고 지냈던 것도 아니고
그 존재마저 몰라 육친에 정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민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는 일이 될 수도 없지 않은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생에 못 풀었던 인연이 그렇게 풀렸을 수도 있으니까,
모든 인연엔 이유가 있다 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한편으론 그녀와의 인연이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신기하기도 했다.
4500백만의 인구 중에, 그 많고 많은 술집 중에, 그 보다 더 많은 접대여성과 그 보다 더 많은 손님들 중에,
물론 사람은 서울로 모인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고향과는 머나먼 곳에서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이 말이다.
확률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어도 만나지 못했을 텐데 그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확률은 더 희박해 질 것이다.
불연 듯 며칠 전 신문에 조그맣게 실렸던 해외 토픽 기사가 떠올랐다.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일로 50대 중년의 남자가 호텔방에서 콜걸을 불렀더니 자신의 딸이 들어왔다는 기사였다.
그것도 참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확률로 따진다면 내 쪽이 훨씬 낮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고향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모르고 지났을 일이다.
그것까지 알게끔 이어진 그녀와의 인연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인연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지만 억지로 인연을 잡지 아니한다.
운명에 순응하며 살자는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고,
연애에 애타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인연에 대한 궁금증도 그녀의 존재도 서서히 잊혀졌다.
어느덧 3개월이란 시간이 흘러 4월로 접어 들었다.
간간히 꽃샘추위가 살갗을 에이며 괴롭혔지만 남쪽에선 봄소식이 하나 둘 들려오기도 했다.
그 즈음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녀, 6촌 동생 희은이였다.
속으론 반가웠지만 통화는 서먹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별 말없이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저녁에 약속을 잡았다.
지금은 난타전용 극장으로 바뀐 청담동 키네마 극장 앞이 약속 장소였다.
신호를 받고 사거리를 건너오며 속도를 줄였다.
훤칠하게 큰 키에 스타일리쉬한 옷차림, 운전석에서도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일단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양수리로 향했다.
그리고 한 시간 조금 못 달려 어느 조용한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웠다.
“이모는 건강하시지?”
“우리 엄마?”
“응.”
“나이 드시는 것 빼고는 건강하시지. 먼저 먹을 것부터 시키자. 뭐 먹을래?”
“아무거나 괜찮아.”
“음, 그럼 스테이크 시킬게. 웰던, 미디움?”
“많이 익힌 거.”
난 처음부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식사하는 동안 레스토랑 분위기며 연예가의 잡다한 이야기 등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실 헤어지는 순간까지 가벼운 분위기로 이끌고 싶었다.
어차피 나나 그녀나 모든 것을 아는 상황인데 구지 같은 말들을 되풀이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저 우리에게 있었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의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이 만남에 나온 목적이기도 했다.
결국 분위기는 내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고 의도했던 것처럼 서먹함이나 어색함도 많이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나도 그랬지만 그녀 역시도 짐을 털어버린 후의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오빠 저기 앞에 세워주면 돼.”
그녀의 손가락이 새로 지었는지 깨끗하게 보이는 어느 연립 주택을 가리켰다.
“지은 지 얼마 안되나 봐?”
“네, 저번 주에 이사했어.”
“산 거야?”
“아니, 전세야.”
“응.”
“잠시 들어갔다 갈래?”
“아니, 괜찮아!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그녀가 문고리를 열려다 말고 말을 이었다.
“참, 나 이제 거기서 일 안 해.”
“잘 된 건가?”
“후훗.”
“왜?”
“오빤 진짜 특이한 거 같아.”
“뭐가?”
“생각해 봐. 남들 같으면 당연히 잘 했다고 할 텐데. 아니 하지 말라고 막 말렸겠지.”
“잘 되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
“오빠 여자친구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럼 이제 무슨 일 하려고?”
“일 안 해, 졸업이나 해야지.”
“몇 학년인데?”
“4학년. 반 학기 쉬어서 올 가을에 졸업해.”
“선물 준비하라 이거지?”
“하하하,, 오빠도 참! 아무튼 오늘 즐거웠어.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그럼 오빠 갈게.”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다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만날 이유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주말에도 우린 만났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딱히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없었던지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있었고
나를 통해서 그 외로움을 달래려 했다.
나 역시도 그녀를 멀리할 이유도 없었고, 사귀는 사람이 없었으니 구애될 것이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육체관계만 없다 뿐이지 다른 연인들의 데이트와도 같았다.
영화도 보고 전시회 같은 곳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것은 애초에 그녀가 나에게 바랬던 것이기도 했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도 육친의 정이 느껴지거나 쌓이지는 않았다.
이미 육체관계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친척이라고 재인식하기엔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런 점에선 어린 시절 옆집 살던 여자애들 보다 그 존재감이 미약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피가 당겨서 만난 게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타인으로서, 이성으로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극장에서였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잡았는데 뭔가 찌릿한 느낌이 전해지더니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맞잡은 손끼리 약속한 듯 깍지를 끼게 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녀가 사귀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깍지 끼고 손잡는 느낌,
떨림과 설렘이 가득한, 연애를 해 본 사람이면 한번쯤은 느꼈을 그 기분에 애처로움이 더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애처로움은 애처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떨림과 설렘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날 밤 나는 위험한 상상을 했다.
다시 만난 지 한 달쯤 지난 시기였다.
이미 육체관계를 맺었으니 상상 하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되지만 상상하는 것뿐인데 거칠 것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그 동안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여자들도 유부녀 이거나 후배의 여자,
혹은 임자가 있는 여자들로 하나같이 금단의 대상이었다.
자극적인 음식도 자주 먹다 보면 적응이 된다.
때론 더 강한 자극을 찾아 나설 때도 있다.
희은이를 대상으로 상상하는 것은 나에겐 더 강한 자극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의 육체관계가 만족스러웠다는 사실도 한몫 거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색을 즐기는데도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건지?
나는 그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면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
그것은 여성편력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속 궁합이 맞지 않으면 제 아무리 테크닉의 내공이 깊다 한들,
절새 미인이라고 한들 육체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늘어날수록 그런 경향은 뚜렷해지고 확고해졌다.
때문에 연애를 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었다.
언제 인가부터 친구들에게 눈이 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그런 나의 외고집 때문에 나와 육체코드가 맞는 여자를 찾다 보니
외모의 평가기준이 자연스레 뒷전이 되어버렸던 탓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외모에 대한 평가기준을 낮추고도 내 취향에 맞는 여성을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까칠한 나의 취향을 채우고도 족한 여성이 그녀였던 것이다.
게다가 희은이는 외모도 출중했다.
6촌이란 틀만 없다면 나에겐 최상의 이성이었다.
5월 중반이 되자 벌써 더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 때쯤 우리는 주말이건 주중이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빈번히 만났다.
손을 잡고 다니는 것 외엔 달리 애정표현을 하지도,
그 이상을 시도하지도 않았지만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교감할 수 있었다.
때론 이성을 잃어 선을 넘지나 않을까 하는 나 자신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 집 앞까지 바래다 주는 일만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째 주말인가?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일기 예보에도 없던 거센 빗줄기를 우산도 없이 대면하게 되었다.
여름을 알리는 장마비 같이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어 빗속을 뚫고 택시 정류장으로 뛰었다.
사람들이 몰려 택시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빠, 버스 왔다. 그냥 버스타자!”
“그럴까?”
“오빠 뛰어!”
텅텅 빈 채로 멈췄던 버스 안은 금새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더 곤욕스러운 건 대부분이 물에 빠진 생쥐 같은 흠뻑 젖어 꿉꿉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다들 옷 입은 채로 샤워라도 하고 온 꼴이었다.
거기다 비 때문에 도로는 더욱 혼잡스러워져 30분 걸릴 거리가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차라리 비를 맞고 걷는 편이 더 상쾌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빗줄기는 약해지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까지 가세해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 비를 온 몸으로 다 받아내야 했다.
금새 속옷까지 젖어버렸으니 비를 피할 곳을 찾는 것도 뛰는 것도 소용없는 짓이 돼버렸다.
이 상태로는 택시를 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희은이 혼자 보내는 것도 그렇고 해서 빗 속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해서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오빠 바로 씻어.”
“아냐, 너 먼저 씻어”
“나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오빠부터 빨랑 씻어!”
거실 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로 갔다.
물에 젖어 옷 벗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론 정장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빠, 갈아 입을 옷은 문 앞에다 둘게.”
“응, 빨리 씻고 나갈게.”
희은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돼 후다닥 씻었다.
전역한 이후로 그렇게 짧고 빠르게 씻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수건으로 몸에 물기를 닦아 낸 후 문을 열어 그녀가 준비해둔 옷을 입었다.
그런데 반바지가 문제였다.
마치 이종 격투기 선수처럼 쫄바지를 입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속옷을 입지 않았으니 그 부분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희은아, 다른 바지 없어?”
“왜? 작아?”
“좀 끼는데.”
“군살도 없으면서.”
“남자 몸이 보는 거랑은 또 틀려.”
“근데 어쩌지? 이사 오면서 안 입는 거는 다 버렸거든. 그나마 그게 젤 큰 건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T셔츠를 큰 걸로 줄까?”
“그래, 그거라도 있음 줘!”
희은이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단이 긴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막상 입고 보니 바지 단보다도 길어 아래는 아무것도 안 걸친 것처럼도 보였다.
“하하, 이쁘네. 원피스 입은 것 같다. 오빠.”
그녀가 씻는 동안 집 안을 기웃거렸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정리 되어있었다.
여자 특유의 산뜻한 향기도 폴폴 풍겼다.
나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폐 속 깊이까지 들여 마셨다.
단언하건대 이건 변태 짓이 아니다.
남자들이라면 이유 없이 한 번쯤은 해 보게 되는 본능 같은 행동이었다.
“아~ 상쾌하다.”
“다 씻었어?”
“응, TV라도 보고 있지 그랬어? 혹시 변태 짓 한 건 아니지?”
“날 뭐로 보고!!!!”
“히힛, 발끈하시긴. 커피 줄까?”
“난 블랙으로.”
T.V보고 얘기하고 하는 사이 시계바늘은 2시간이나 훌쩍 지나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분위기도 조금씩 밍숭맹숭해졌다.
“오빠 술 한잔 할까?”
“내가 사올까?”
“집에 양주 있는데 그거 마실래?”
“뭔데?”
“데낄라. 간혹 잠 안 올 때 한잔씩 마시거든.”
“너 설마 알코올 중독?”
“하하,, 어쩌다 그러는 건데 뭐!”
그 때부터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탁자 위에 술상을 차려냈다.
“레몬도 소금도 없는 데낄라에 김치찌개라니!!”
“뭐, 오빠 올 줄 알았나! 마시기 싫음 됐어.”
“아니, 이 오빠가 다 마셔주지.”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급하게 마신 것은 아니지만 마신 양에 비하면 평소보다 취기가 덜했다.
그저 기분 좋게 알딸딸한 상태라고 할까?
빗소리에 분위기도 차분히 가라앉는 게 모든 것이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오빠.”
“응?”
“왜 오빠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물어봐?”
“……”
“왜 그런 데서 일했는지, 언제부터 일했는지, 안 궁금해?”
“사연이 있었겠지. 그리고 괜히 너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아서.”
“그럴 것 같았어. 근데, 너무 관심 없어 하는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해!”
희은이가 술을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고해성사하듯 묻지도 않은 말들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어서 그런지 객지에서 혼자 학교 생활 한다는 게 적응이 안 되더라. 친구도 못 사귀겠구 그림도 잘 안 되구. 그러다가 미술학원 시간 강사로 알바를 하게 됐는데 거기 선생 중에 한 명이랑 친하게 된 거야. 그 언니는 성격도 좋고 잘 챙겨주고 다 좋았는데 소비가 좀 심했어. 명품 되게 좋아했거든. 첨엔 그렇게도 안 좋게 보이더니 어느새 스트레스만 받으면 나도 그러고 있더라구. 특히 구두나 신발만 보면 눈이 돌아가 버려서. 지금은 반 정도 처분했지만 그래도 한 50켤레 정도 있어. 한 켤레에 최소 20~30만원은 했으니까 다 합하면 못 되도 삼천만 원 정도는 쓴 거지. 그게 6개월 사이에 저지른 일이었어.”
“아니,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서?”
“카드지 뭐!”
“도대체 한도가 얼마기에?”
“알바비, 집에서 생활비 보내주던 거, 그러다 학비에도 손 대고, 나중에는 겁도 없이 사채도 쓰고. 완전히 정신 나간 상태였어.”
“그래서 술집 다니게 된 거야?”
“응, 뻔한 스토리지만 그래.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랬던 거지.”
“그럼 지금도 빚이 남았니?’
“아니. 난 그나마 운이 좋았나 봐. 거기서 일 한지 3개월 만에 스폰을 만났거든. 그 아저씨가 다 갚아줬어. 거기다 아파트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학비도 대주고, 용돈도 주고.”
“다행인 거지?”
“그럼, 마담언니도 나만큼 운 좋은 애는 못 봤다고 했는데.”
“그 아저씨 좋은 사람이었나 보네.”
“응, 그런 술집 안 좋아하는 거 보면 오빠랑 좀 비슷한 구석도 있어. 자기 말로는 조그만 기업이라는데 거기 사장님이었어. 회사가 잘 돌아 가는지 바이어들 접대한다고 주말마다 오더라구. 그 때 몇 번 들어갔다가 아저씨 눈에 내가 띈 거야. 그래서 3개월 만에 빚도 다 갚고, 술집에서도 나왔고, 남들 말로 인생 풀린 거지.”
“근데 왜 다시 술집에 나온 거야? 아저씨랑 헤어진 거야?”
“아니, 헤어진 건 맞는데 그 때문에 술집에 다시 나간 건 아니야!”
“그럼?”
“작년 가을에 아저씨 회사가 부도 났어. 보증 서준 것도 문제가 되고 어음도 휴지 조각되고 사기 당한 것도 드러나고, 사람 망하는 게 순간이더라고! 드라마에서도 그런 장면들 많잖아. 나도 직접 보진 못했는데 아저씨 집에도 압류딱지 다닥다닥 붙어있었겠지! 아저씨는 금방 재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그리고 당장 아저씨 어머니랑 중학생, 초등학생 딸 살 곳도 없게 됐는데. 그래서 일단 아저씨가 내 이름으로 사준 아파트 비워 드렸어.”
“그건 정말 잘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 딱 두 명이다. 우리 마담언니랑 오빠. 가게에서 일하는 애들하고 아는 언니는 아깝지 않느냐고 먼저 묻던데.”
“어차피 네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 아저씨 너한텐 은인이시잖아.”
“그래, 알아! 첨엔 그것도 안받으려고 하셨어. 근데 어머니랑, 애들 이야기 꺼내니까 결국 고맙다고 하시면서 막 우시더라구. 사실 아저씨한테 받은 거 다 드릴라고 했는데 아저씨가 그것까지는 정말 싫다고 하셔서.”
“아저씨 와이프는?”
“큰 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대. 그래서 할머니께서 애들 키우시는 거고.”
“아저씨랑 지금은 연락 안 해?”
“응, 그 뒤로 연락이 안돼. 빚쟁이들 피해서 아저씨만 지방 어디에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럼 아저씨한테 보탬 되려고 다시 술집 나오는 거야?”
“오빠, 나 그렇게 순정파 아니야!”
“그럼 왜 다시 술집 다니는 건데? 빚도 다 갚았다고 했잖아.”
“마담 언니 기억나?”
“응.”
“그 언니가 나한텐 큰 언니 같은 사람이거든. 그 언니가 나한테 돈 모아서 유학 가라고 하더라구. 나 같이 한번 큰 사연 겪게 된 여자들은 팔자가 뒤숭숭해진다고 차라리 외국에서 살던가, 아님 남자 못지 않게 자기 자리 만들어서 살아야 한데.”
사랑 받을 만 하니까 사랑 받는 거고, 뭔가 줄만 하니까 주는 거다.
마치 한편의 소설 같은 희은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은이를 모른다면 그 아저씨란 사람이 술집 한 여자에게 힘들게 벌은 재산을 대가 없이 주는 것이
미친 짓과도 같아 보이겠지만 그 아저씨에게 희은이는 줄만 하니까 주었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희은이였기 때문에 그 아저씨가 아낌없이 주었던 것이지
다른 여자에게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부도 후에 희은이가 보였던 행동이나 마음 씀씀이를 통해서
그 아저씨는 애초부터 자신의 느끼고 있었을 희은이의 모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 했을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결국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 아닌가!
부를 잃는 다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좌절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경 속에서 자신에게 진실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지 않을까!
어차피 죽는 그 순간에는 가져갈 수 없는 부보다는 자신이 만났던 진실한 인연이 분명 더 소중할 것일 듯 하다.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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