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선배녀 19부

야오리 3,239 2019.05.08 20:00
나는 아침 일찍 차를 끌고 소연이네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한 보따리의 짐을 안고 나오는 소연이였다. 짐들을 건네받아 차에 싣고 소연이도 차 안으로 모셨다.
 
우리의 목적지는 내가 차를 쓸 수 있다는 얘기를 한 그 날 정해졌었다. 소연이는 속초에 가기를 원했고, 나는 딱히 가고 싶었던 곳이 없었기에 소연이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소연이는 반드시 국도를 타고 가야 한다며 내게 국도로 가는 방법을 익혀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국도로 속초 가는 방법을 달달 외워두었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프린트까지 해두었다.
 
우리는 산뜻한 기분으로 출발하였다. 룰루랄라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달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차가 엄청 막혔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 속에서 소연이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소연이가 속초를 가고 싶어 한 이유와 국도를 고집한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소연이의 어머니는 소연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고, 인제에 있는 산에 묻혔다는 것이다. 또한 소연이는 인제가 속초 가는 길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길이 국도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연이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이용했을 텐데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막히기까지 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소연이는 내 표정을 보더니 내가 자신을 동정하는 줄 알고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했고, 그런 소연이를 보니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엉금엉금 기어 양평을 지나자 조금씩 정체가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껏 막혀 있던 길에 분풀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마구 밟았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소연이 어머니의 산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연이 어머니의 산소는 벌초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소연이는 그 앞에 앉아 말을 꺼냈다.
 
“엄마, 오랜만이야. 입학하고는 처음 왔지? 미안해. 빨리 안 와서……. 대신 이렇게 선물 가져왔잖아. 엄마 딸 남자친구…… 잘 생겼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 데려왔어. 이제 나도 다 컸지? 시집가도 될 거 같지 않아?”
 
소연이는 애한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빠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겠지? 엄마도 떠났는데 나마저 떠나면 우리 아빠 너무 불쌍하잖아. 지금도 불쌍한데…….”
 
소연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엄마한테는 정말 미안한데 나…… 아빠가 다른 여자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좋겠어. 아빠가 그럴 수 있게 엄마가 놓아주면 안 돼?”
 
소연이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미안해, 엄마. 내가 괜한 말해서…… 걱정하지 마. 내가 끝까지 아빠 곁에 있어줄게.”
 
나는 소연이 곁으로 가 소연이를 꼭 안아주었다.
 
“소연아, 넌 너네 아빠 곁에 꼼짝 말고 있어. 내가 네 곁으로 갈 테니까.”
 
“고마워.”
 
“어머님,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연이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키스가 끝나고 소연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 미안. 그냥 못 본 척 해줘. 알았지?”
 
나는 소연이의 어머님께 소연이를 내 여자로 평생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산소에서 내려왔다.
 
속초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속초에 오긴 했지만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소연이가 속초를 택한 것도 엄마 산소와 가까운 관광지였기 때문이었을 뿐 다른 이유가 없었기에 소연이도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름대로 오기 전에 속초를 조사했었기 때문에 소연이가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보기를 내주었다.
 
“그럼 산으로 갈까? 아님 바다로 갈래? 여기 호수도 있다던데……”
 
“산은 싫은데…… 동해 왔으니까 바다로 가자.”
 
“그럼 우리 점심 먹어야 하니까 일단 대포항 가서 회 한 접시 먹자. 어때?”
 
“좋아.”
 
나는 대포항으로 차를 몰았다. 항구 옆에 주차장이 있어 거기에 주차하고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들어서는 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오징어순대와 새우튀김을 팔고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워 절로 군침이 삼켜졌다. 커다란 새우가 튀김옷을 입고 통째로 튀겨져 눈으로 보기에도 바삭바삭하고 고소했다. 소연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새우튀김 맛있겠다. 그치?”
 
“어, 나 방금 군침 넘어갔어.”
 
“갈 때 사가자. 응?”
 
“우리 소연이가 먹고 싶다면 당연히 사야지.”
 
소연이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따라왔다. 왼편에는 일반적인 건물들에 횟집이 들어서서 늘어서있었고, 오른편에는 작은 집들이 쭉 이어진 채로 바다 위에 띄워져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집들도 전부 횟집이었지만 소연이는 그리로 갈 마음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 집들은 조금 지저분해 보여서 그런지 왼편에 있는 횟집의 수족관에만 눈길을 주었다.
 
횟집 사장님 같은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하며 우리의 눈길을 차지하려 했지만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연이는 물고기에 정신이 팔려 들어갈 생각도 없이 마냥 걸으며 구경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소연이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 아저씨가 나타나서 소연이의 앞길을 가로막고는 구수한 사투리로 싸게 해줄 테니 들어가자고 했다. 소연이는 날 쳐다보며 결정권을 넘겼다. 난 다른 데도 거기서 거기 일 거라는 생각에 대충 가격을 흥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고, 바다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근데 내가 생각했던 바다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바다를 보며 회를 먹을 수 있다는 글을 봤을 때 떠올린 그림은 탁 트인 바다에 빨간 등대가 하나 서있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근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탁 트인 바다의 느낌이 아니라 일터의 냄새가 물씬 나는 바다였다. 왠지 끼니를 때운 다음 배를 타러 나가거나 부둣가에 앉아 그물을 고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항구에 있는 횟집이라고 해도 항구랑 조금은 떨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항구 옆에 붙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나 이런 바다 말고 시원한 바다 보고 싶어.”
 
지금 나도 이런 광경이 충분히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속초 오면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회를 먹어야 돼.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곳엔 나중에 가는 거야. 이런 데서 회 먹은 다음에…….”
 
“그래? 근데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되게 잘 안다.”
 
“와본 건 아니고…… 유명하니까 아는 거지.”
 
“여기 유명한 곳이야?”
 
“관광지로 좀 유명해.”
 
사실 나도 이번에 소연이 때문에 알게 된 곳이라서 유명한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인터넷에서 많이 검색되기에 유명한 곳인가 보다하는 생각만 했었을 뿐이다.
 
“그랬구나. 나 속초 몇 번 와봤는데 여기는 처음 와봤어.”
 
“그럼 어디 갔었는데?”
 
“속초 해수욕장이랑 호수 두 군데만 가봤어. 아, 여기 말고 다른 항구도 가봤다. 회 먹으러 항상 거기로 갔었어.”
 
“아는 곳 있으면 거기로 갈 껄 그랬나?”
 
“아냐. 새로운 곳도 와봐야지.”
 
우리가 수다를 떠는 사이 광어, 우럭, 오징어, 멍게가 먹음직스럽게 썰어져 나왔다. 소연이는 젓가락을 집어 들어 우럭 한 점을 입에 넣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질세라 우럭 한 점을 내 입 속으로 안내했다. 싱싱한 우럭이 혀끝에 닿으며 시원하고 탱탱한 감촉이 전해졌고,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었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싶었지만 운전 때문에 참아야 하는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연이는 소주를 시키더니 혼자 회에 곁들여서 홀짝홀짝 마셨다.
 
“소연아, 맛있어?”
 
“응. 입에서 녹아 없어져.”
 
“아니, 소주 맛있냐고…….”
 
“너도 같이 마시면 좋을 텐데…… 아쉽다.”
 
“그럼 딱 한 잔만 할까?”
 
“안 돼. 절대!”
 
“한 잔 정도는 괜찮아. 나 술 쎈 거 알잖아.”
 
“그래도 안 돼. 음주운전은 절대 안 돼.”
 
치사하게도 소연이는 왼손으로 소주병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은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입에 회를 집어넣기도 하고, 소주잔을 털기도 하고, 뒤이어 나온 매운탕 국물과 밥을 떠 넣느라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역시 소연이는 엄청나게 잘 먹었다. 소연이 덕분에 우리는 금세 회 한 접시를 비울 수 있었고, 매운탕 냄비의 바닥까지 보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주 한 병도 혼자서 다 비워냈다. 소연이는 충분히 먹었는지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무 많이 먹었나?”
 
“응. 엄청 먹었어. 너 혼자!”
 
“너…… 소주 안 줬다고 삐친 거야?”
 
“삐치긴 누가 삐쳤다고 그래?”
 
“아니면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조용히 말해.”
 
나는 오기로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누가 소리를 질렀다고 그래?”
 
“쪽팔려. 그만해.”
 
“쳇,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연이는 술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게 매달려 활짝 웃었고,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코를 찡긋했다. 나는 소연이의 애교에 사르르 녹았다.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연이의 애교가 평생 내 발목을 잡을 것 같았다.
 
소연이는 연신 웃으며 내 팔에 매달려 가슴을 부비며 날 따라왔다. 혼잡한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싫어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장까지 한걸음에 내달려 소연이를 태우고 속초 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해수욕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름이 아니니 당연히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가로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소연이와 나는 말없이 바다냄새를 맡으며, 그리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백사장을 거닐었다.
 
“나 업어주면 안 돼?”
 
“여기서?”
 
“응.”
 
나는 허리를 숙였고, 소연이는 내 등에 살포시 업혔다. 그냥 걷기에도 불편한 모래사장인데 소연이를 업고 걸으려니 모래가 더욱 거치적거렸다.
 
“나 무거워?”
 
“아니.”
 
“그럼 웃어.”
 
“웃고 있어. 이렇게…….”
 
내가 활짝 웃어보이자 소연이는 귀엽다며 뽀뽀를 해주었다. 뽀뽀보다는 내 등에서 내리는 게 더 좋은 선물인데 그걸 몰라주는 소연이였다.
 
“모래 밟는 게 몸에 좋대.”
 
“업어주기 힘든 거야?”
 
“나 요즘 운동하는데 왜 하는 줄 알아?”
 
“왜?”
 
“너 업어주려고 하는 거야. 앞으로 한 시간도 더 업어줄 수 있어.”
 
“정말?”
 
“근데 너도 모래 한 번 밟아보면 좋을 텐데…….”
 
“아까 많이 밟았으니까 괜찮아.”
 
결국 나는 해수욕장 한편에 있는 벤치까지 소연이를 업고 가야했다. 얼른 소연이를 벤치에 내려놓으며 나는 소연이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여기 좋다. 바다도 잘 보이고……. 정말, 정말 좋구나.”
 
“날 내려줘서 좋은 게 아니라?”
 
“너 업고 있는 게 더 좋아. 네 몸 만질 수 있잖아.”
 
“으이구.”
 
나는 삐죽거리는 소연이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소연이를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한 걸 보여줘야할 때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소연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여기 뭐 묻었네.”
 
“아름다움, 이런 말 하려고 그러지?”
 
“모래 묻었었어.”
 
소연이는 내가 느끼한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사전에 막아 무안을 주려 했었나보다. 나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농담은 절대 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연이에게만큼은. 나는 소연이에게 특별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는 척을 했다.
 
“뭐해?”
 
“뭐 좀 찾아.”
 
“뭐?”
 
난 바닥에서 모래 한 알을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소연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뭐? 모래?”
 
“응. 네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모래. 함부로 버려두고 갈 순 없잖아.”
 
“치, 그게 내 볼에 묻었던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내 눈에는 잘 보여, 네 아름다움이. 이 모래를 백사장 어디에 던져놔도 난 찾아올 수 있어.”
 
소연이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바닥 위의 모래를 집더니 모래를 던져버렸다.
 
“찾아와봐.”
 
소연이는 나의 느끼한 농담에 면역이 되었는지 예전의 귀여운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이젠 날 갖고 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찾을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표정으로 보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연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모래사장을 질러 한참을 걸어가 바다 가까이쯤 갔을 때 소연이가 말했다.
 
“여기까지 날아왔을 리가 없잖아.”
 
“기다려봐. 이쯤인 거 같아.”
 
나는 두어 걸음 더 걸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모래를 찾는 척 했다.
 
“여기 없으니까 일어나. 가자.”
 
나는 준비했던 반지를 손에 쥐고 소연이에게 몸을 돌려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연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고, 나는 한 손으로 소연이의 손을 잡아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네 아름다움이 묻으면 하찮은 모래도 이렇게 고귀한 보석으로 변해. 하찮은 나도 너의 곁에 있으면서 빛을 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윤호야…….”
 
소연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커플링이니까 항상 끼고 있어야 해.”
 
소연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소연이의 볼에는 눈물이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울어? 우리 소연이 아름다움이 씻겨 내려가잖아.”
 
소연이는 내 가슴을 톡 치며 귀여운 앙탈과 함께 내 품에 폭 안겼다. 나는 소연이의 얼굴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지만 우리의 입술을 떨어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더욱 떨어지지 않으려 열정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빨아들이게 만들고 있었다.
 
 
 
* * *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많이 지쳐있기도 했고, 배도 무척이나 고팠었다. 계속 쏘다니느라 하루 종일 운전한 탓도 있었지만 한 바퀴 도는데 자전거로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영랑호를 두 바퀴나 돌았던 게 큰 피로와 허기를 안겨주는 것 같았다.
 
시장이 만찬인데다가 맛있다고 소문난 생선구이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더니 허겁지겁 먹어치워 허기는 금세 해결되었지만 피곤한 기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크게 기지개부터 켰다.
 
“많이 피곤해? 이제 갈까?”
 
“어디? 서울?”
 
“응. 지금 가도 새벽에 도착할 거 같은데…….”
 
오늘 나는 엠티를 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소연이는 집에 들여보내고 난 집 근처 모텔이나 찜질방에서 자도 되는 것이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까지 나왔는데 소연이와 같이 자고 내일 같이 돌아가고 싶었다.
 
“좀 피곤한데 어디서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시트 눕혀서 눈 좀 붙여.”
 
“그렇게 자면 더 피곤해. 잠은 제대로 자야 되는 거야.”
 
“그럼 어디서?”
 
나는 소연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텔…….”
 
“안 돼.”
 
“왜? 난 잠깐 눈 붙이고 넌 텔레비전 보고 있음 되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네가 날 못 믿으면 누가 믿어줘?”
 
“넌 아무도 못 믿어.”
 
“그럼 내 손, 발 다 묶어놔.”
 
“그래도 안 돼.”
 
“미이라처럼 칭칭 감아놓을래?”
 
“잔말 말고 그냥 가.”
 
“몰라. 네가 뭐라 그래도 지금 난 운전 못 해.”
 
“알았어. 나 택시 타고 갈게.”
 
구슬려도 보고 떼도 써보았지만 소연이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내 입이 삐죽 나와 있었지만 소연이의 단호한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소연이를 모텔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소연이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맥주나 한 잔 하고 가자. 바다 왔는데 바다 보면서 맥주 한 잔은 해야 되지 않겠어?”
 
“너 술 핑계로 운전 못 하겠다고 하려고 그러지?”
 
“아니야! 난 술 안 마실 테니까 너 혼자 마셔. 그럼 됐지?”
 
“음…… 좋아. 넌 한 모금도 마시지 마.”
 
“알았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취해서 못 갈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마. 나 많이 안 마실 거야.”
 
“이거 왜 이래? 나 깨끗이 포기했어. 맥주 한 잔 하고 집에 갈 거야.”
 
소연이는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술을 마시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성공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아까 그 새우튀김 사가서 먹을까?”
 
“아, 맞다. 새우튀김!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 했어.”
 
“그럼 새우튀김 사러 달려갑니다.”
 
새우튀김 한 봉투와 한 팩의 맥주 캔을 사서 바다를 마주하고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타고 오는 파도소리가 내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귀띔해주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밤바다만큼 좋은 게 없는 거 같아.”
 
“너랑 둘이 있으니까 더 좋아.”
 
“그럼 밤새 같이 있자니까.”
 
소연이는 내게 얄미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싫어요. 집에 갈 거예요.”
 
소연이가 두 캔의 맥주를 마셨을 때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뭐해?”
 
“바닷물에 발 담가보려고.”
 
나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바다로 달려갔다. 내 발을 적시는 바닷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소연아, 완전 시원해. 너도 와서 담가봐.”
 
소연이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지만 나는 계속 외쳤다.
 
“소연아, 사랑해. 여기 와서 내 사랑을 받아줘.”
 
수차례 더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나서야 소연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연이도 신발과 양말을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고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달려왔다. 내 품까지 달려온 소연이를 나는 꽉 껴안아 한 바퀴를 돌린 다음 내려주었다.
 
“앗, 차가워.”
 
소연이는 얼른 물 밖으로 나갔고, 나도 재빨리 소연이를 따라 나갔다.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니 소연이는 아니꼬웠던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는 밀려오는 고통에 정강이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왜?”
 
“너 일부러 그런 거잖아, 나 놀리려고.”
 
“아니야. 바다에서 맡는 바다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백사장에서 느끼는 거랑 차원이 달라. 난 그저 너한테 그런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정말…… 달라?”
 
“당연하지. 얼마나 다른데…… 다시 들어갈래?”
 
“싫어. 너무 차갑단 말이야.”
 
“그럼 내가 업어줄까?”
 
“응!”
 
소연이를 업은 나는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닷물이 내 무릎 위까지 올라와 옷을 적신 다음에야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 옷 젖었어. 어떡해?”
 
“괜찮아. 냄새는 어때? 시원하지?”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저기 오징어 배 보여?”
 
“응.”
 
“오징어들이 저 불빛을 쫓아가잖아.”
 
“오징어가 불빛을 쫓아가듯 너도 나만 쫓아오겠다고?”
 
“아니. 나도 저 불빛을 쫓아가려고.”
 
나는 다시 발을 떼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너 왜 그래? 미쳤어?”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장난치지 마.”
 
“그럼 내려줄까?”
 
“싫어! 빨리 돌아가.”
 
나는 소연이의 말을 무시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소연이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차가워! 그만해.”
 
“아, 아파. 놔.”
 
“그러니까 돌아가.”
 
“아파서 손 놓칠 거 같아. 일단 머리카락부터 좀 놔.”
 
소연이는 살며시 내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자리에 폭삭 주저앉으며 소연이를 놓아버렸다. 소연이는 허리까지도 채 오지 않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소연이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일으켜 세워주었다. 소연이는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울먹였다.
 
“너…… 너 진짜 죽을래?”
 
“우리 소연이 춥겠다. 빨리 나가자.”
 
나는 소연이를 번쩍 안아 올려 백사장으로 달려 나갔다. 소연이는 계속 내 가슴팍을 때리며 앙탈을 부렸고, 나는 넉살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다 받아주었다.
 
“이제 어떡해?”
 
“그러게. 어떡하지? 이대로 있음 감기 걸릴 거 같은데…….”
 
소연이가 매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지만 나는 무서움보다는 흥분이 앞섰다. 소연이의 시선을 피하려던 내 눈길은 소연이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쫙 달라붙은 소연이의 티셔츠 덕분에 소연이의 커다란 가슴은 아름다운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나는 소연이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잠깐 모텔이라도 갈래?”
 
“너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런 거지?”
 
“아니야.”
 
“내 가슴 말고 내 눈 보고 얘기해.”
 
나는 음침한 눈으로 소연이의 눈을 쳐다봤다. 소연이의 눈에는 살기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공포에 정신이 든 나는 맑고 선한 눈빛으로 바꾸고 순수한 투로 말했다.
 
“씻기만 하고 나오는 거야. 아무 것도 안 하고 딱 씻고 바로 나오는 거야. 그리고 너 씻는 동안에는 난 밖에 나가서 네가 입을 만한 옷 사오는 거지. 어때?”
 
“너 지금 또 수 쓰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어? 네가 들어봐도 그럴 건더기가 없잖아.”
 
“씻고 바로 나올 거니까 허튼 짓 할 생각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빨리 가자. 감기 걸리기 전에…….”
 
아직 완전히 성사된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한 단계만 넘으면 소연이와 하나 될 수 있다는 기분에 들떴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소연이와 모텔로 향하는 발걸음을 최대한 빨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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